25일 겸손: 나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긴다
본문: 누가복음 14:8-11절 (KRV)
"네가 누구에게든지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거든 상좌에 앉지 말라 혹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거든 차라리 말석에 가서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친구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 본문 관찰하기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의 혼인 잔치 문화를 배경으로, 스스로 높은 자리를 탐하지 말고 오히려 낮은 자리를 선택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당시에는 잔치 자리의 위치가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였기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상좌를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문화적 태도를 지적하시며, 말석에 앉는 자가 오히려 영광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핵심은 마지막 구절인 11절에 요약됩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나님 나라는 자기 높임이 아니라 자기 낮춤의 원리가 지배합니다.
2)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된 삶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은 인간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비교하고, 경쟁하며,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본성을 변화시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겸손을 닮아가기로 결단할 때,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타인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를 형성하게 하십니다. 겸손은 단지 소극적인 미덕이 아니라, 다른 이의 가치를 높이고 자신을 기꺼이 낮추는 능동적인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3) 하나님의 시각으로 살아가기
(1) 창조: 형성 (Formation) — 서로를 존중하도록 창조됨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공동체적 존재로 창조하셨고, 서로 협력하고 존중하며 살아가도록 설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사랑으로 연결되는 관계 안에 존재해야 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은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2) 타락: 왜곡 (Distortion) — 죄로 인해 교만해지고 타인을 멸시함
죄로 인해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바뀌었고,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낮게 보며 경쟁과 지배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상좌를 먼저 차지하려는 자리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타인을 경시하는 교만의 표현입니다. 타락은 존중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비교와 경쟁으로 인간 관계를 왜곡시킵니다.
(3) 구속: 정화 (Purification) — 그리스도를 통해 겸손이 회복됨
예수 그리스도는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는 실제로 우리를 나보다 낫게 여기시며 십자가를 지셨고, 이로써 참된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구속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겸손을 우리 삶에 적용하게 하며, 성령은 우리가 교만을 버리고 타인을 귀히 여기는 겸손한 삶으로 나아가도록 돕습니다.
4)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는 삶: 겸손을 통해 섬기기
(1) 나는 지금 누구를 나보다 낫게 여기고 있는가? 지금 당신은 가족, 동료, 교회 지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혹시 은연중에 그들을 자신보다 낮게 여기거나 무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이 높이고 있는 자리는 무엇이며, 누구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습니까?
(2) 나는 지금 어떻게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말할 기회를 양보하고,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는가? 나는 인정받지 않아도 묵묵히 섬기고 있는가? 나는 다른 사람의 성취와 기쁨에 진심으로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고 있는가? 나는 타인의 실수 앞에 비난보다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3) 나는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떤 결단을 내리고 있는가? 나는 지금 낮은 자리에서 먼저 섬기고 있는가? 나는 내 자존심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우선하고 있는가? 나는 나의 유용성을 드러내기보다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하고 있는가? 나는 섬김의 기회를 부담이 아닌 특권으로 여기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