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연] "분변과 미래의 심판": 검찰과 사법부, 타노스의 의자에 앉다

정의의 여신(Lady Justice)

2025년 초봄, 정치판 한복판에 폭탄이 떨어졌다.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대법원이 유죄 취지의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재명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이게 유죄라고?"와 "이제 다 끝난 거 아냐?"라는 반응을 동시에 쏟아냈다. 하지만 이 사안을 단순한 사실관계 공방 정도로 보아선 안 된다. 이것은 권력 기구들 사이의 조율되지 않은 충돌이며, 그중에서도 검찰과 사법부의 해게모니 경쟁이라 할 수 있다.


검찰: 과거를 캐내 권력을 설계하는 자들

검찰은 기본적으로 과거를 다루는 기관이다. 법 위반 여부를 따지기 위해선 당연히 지난 일을 조사해야 한다. 문제는 그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하나의 행위가 어떤 사람을 '악인'으로도, '억울한 피해자'로도 만들 수 있다. 말하자면 누가 개똥을 쌌는지를 분석하는 직업과 비슷하다. 냄새 나고 보기 싫지만,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검찰은 그 분석을 넘어서 때때로 개똥을 코끼리 똥으로 바꾸기도 한다. 한 마디 말, 한 장의 사진을 가지고 한 사람의 전체 인생을 재단하는 것이다. 이재명 후보에 대한 기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말이 사실이냐"보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라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처럼 느껴졌다. 진실 규명이 목적이었는지, 권력의 판을 흔들기 위한 의도였는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사법부: 미래를 판결하는 '신의 의자'에 앉은 자들

사법부는 검찰과 다르다. 검찰이 과거를 해석한다면, 사법부는 미래를 결정한다. 특히 대법원은 그러하다. "이 발언이 선거에 영향을 주었는가", "이 기준을 만들어야 이후에도 혼란이 없지 않겠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즉, 과거를 딛고 미래를 설계하는 기술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엔 속도가 빨랐다. 전원합의체까지 가동해 한 달 만에 결론을 내렸다. 평소 같았으면 몇 달은 걸릴 일이었다. 왜 이렇게 서둘렀을까? 나는 이렇게 본다. "우리도 이 나라 미래의 설계자야"라는 메시지를 TV 생중계를 통헤서 대중에게 강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법이라는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안에는 조직의 자존심과 영향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난 사법부의 판단 구조는 민주주의에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사법부는 더 이상 단순히 법 조문에 따라 움직이는 중립적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파장과 정치적 후폭풍까지 계산하며 ‘미래의 균형’을 설계하려는 권력 기관이라는 점을 이번 사건은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지점에서 마블 영화 속 타노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타노스는 말했다. “균형을 위해 절반은 사라져야 한다.” 냉혹하고 계산된 정의, 그리고 스스로를 신의 위치에 올린 절대자의 판단. 지금의 사법부는 마치 타노스처럼 말한다. “미래의 혼란을 막기 위해 지금 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 선택이 정말 절반을 없애야 할 만큼 절박한 것이었는가? 혹은 균형을 가장한 지배의 선언은 아니었는가?

이러한 판단 구조는 곧 사법부 내부의 견고한 카르텔, 즉 서로 감싸고 책임을 회피하는 성벽을 드러낸다. 과연 우리는 이 성벽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 그것은 외부의 비판만으로 되지 않는다. 내부의 투명성과 절차 개혁, 무엇보다 시민들의 끊임없는 감시와 참여가 필요하다. 사법부가 스스로 권력을 견제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이름뿐인 껍데기에 불과하다.


충돌과 공백, 그리고 국민에게 떠넘겨진 책임

문제는 이 두 권력 기관이 동시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할 때 벌어진다. 검찰은 과거를 들고 나왔고, 사법부는 미래를 주장했다. 둘 다 "우리가 최종 해석자"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 사이에서 정치, 공정성, 민심은 증발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유죄 취지이지만 형이 확정되지 않은' 이상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결국 국민이 선택하라는 것이다. 이건 무책임이다. 권력기관 둘이 다툰 끝에 최종 판단을 유권자에게 떠넘긴 셈이다. 정치적 책임은 회피하고, 법적 판단도 완결짓지 않은 채 말이다. 누가 이득을 보든, 누가 손해를 보든 간에 국민은 혼란 속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걸 과연 정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진짜 타노스는 누구인가?

타노스는 힘의 균형을 주장했다. 누군가는 그를 우주의 구원자라 불렀고, 누군가는 폭군이라 불렀다. 지금 이 순간, 검찰과 사법부 모두 “정의”라는 이름으로 힘을 휘두르며 균형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정의가 진짜 민심과 맞닿아 있는지 나는 의문을 품는다. 지금 이 싸움은 정의의 이름을 빌린 힘의 싸움에 더 가깝다.

결국,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진짜 타노스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 타노스가 말하는 균형이 우리의 삶을 위한 것인지, 그들의 권력을 위한 것인지 우리는 끝까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