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세력으로 주류가 바뀌는 선거
낡은 권력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
세상살이에는 단어 하나에도 시대의 켜가 얇게, 때로는 두텁게 쌓여 있다. 그중 '유지(有志)'라는 단어는 유난히 파란만장한 운명을 타고난 말이다. 본디 ‘큰 뜻을 품은 사람’이라는 반듯하고 맑은 의미였지만, 지금은 ‘힘깨나 쓰는 동네 인사’ 정도로 전락했다. 언제, 왜, 어떻게 이런 변색이 일어났을까?
시대의 풍파에 찌든 '유지'의 얼굴
‘유지’의 의미가 퇴색하기 시작한 건 일제강점기, 특히 1930년대 총독부의 강압통치가 극에 달할 무렵이다. 그때부터 ‘유지’는 '관청에 연줄 닿은 사람'이라는 현실적이고 때로는 비루하기까지 한 의미를 덧입게 된다. 이들은 총독부의 촉수 노릇을 하며 지역 민심을 관리하고, 동시에 자기 잇속을 챙기기에 바빴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정부를 세우고, 정치판이 돌아가면서 이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줄’을 타기 시작한다.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 민자당으로 간판은 바뀌었지만, '힘 있는 줄'을 붙들고 '유지' 노릇하겠다는 마음가짐만은 철통같았다. 이들이 지역에서 누리던 권력은 중앙 권력에 비하면 보잘것없었지만, 바로 그 ‘안량한 권력’이 일상 구석구석을 잠식했다.
여당 당원증 하나면 차에 ‘청소년 선도위원’ 스티커 붙이고 주차 딱지쯤은 슬쩍 피해갔다. 구청 민원창구에서도 이들 앞에서는 번호표가 무색해졌다. 이런 소소한 특권이 오히려 더 견고하고 끈질기게 작동한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건 '여당 문화'라는 기괴한 풍경, 그리고 그것이 곧 이 사회의 주류 질서였다.
'주류'라는 착각과 '비주류'라는 현실
반대편에서는 민주당 계열 정당에 가입하는 것 자체가 ‘나는 현 정권에 불만 있습니다’라고 대놓고 말하는 행위였다. 이들은 곧바로 요주의 인물이 됐고, 정보기관의 감시 대상이 됐다. 때로는 생업을 잃고, 사회적 왕따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국민의힘(혹은 그 전신들)의 당원들은 스스로를 '진짜 주인', '기득권의 중심', 즉 '주류'라 자부했다. 그런 의식은 사람 대하는 태도, 사회를 보는 눈빛, 정치적 몸가짐에 그대로 묻어났다. 민주당 정치인들은 허리를 숙이고 후원 계좌를 공개하며 지지를 호소했지만, 국민의힘 정치인과 그 지지층에서는 그런 '을의 태도'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주류 의식은 단순한 정치적 태도를 넘어서, '조선일보를 읽고, 강남에 살고, 국민의힘을 지지해야만 유지요, 주류다'라는 기괴한 사회적 코드로 굳어졌다. 특정 언론과 정당에 대한 지지가 곧 사회적 신분 상승의 지름길로 여겨졌다. 마치 특정 브랜드 옷을 입어야 '힙스터'로 인정받는 것처럼, 정치 영역에서도 이런 황당한 코드가 작동했다.
선거로 뒤집히는 판: 민주화 세력이 만드는 새 주류
그러나 역사는 늘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 바로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오랫동안 '유지'들이 독점하던 '주류'의 자리를 '민주화 세력'이 바꾸려 하고 있다.
이번 선거는 단순히 정당 교체의 문제가 아니다. ‘관청 연줄’과 ‘안량한 권력’에 기대어 살아온 낡은 유지 문화를 청산하고, 시민의 참여와 뜻으로 새 주류를 세우는 역사적 시도다.
'유지'의 이름으로 다시 묻는다
결국, '유지'라는 단어의 기구한 변천사는 우리 사회에서 권력과 특권이 어떻게 뿌리내려 왔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묵직하게 묻고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유지'는 누구여야 할까? 관청의 주변을 맴돌며 기득권의 울타리나 지키는 존재가 아니라, ‘큰 뜻’을 품고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 그 본래 의미의 '유지'를 우리는 다시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기회가 바로 이번 선거다. ‘유지’라는 단어의 슬픈 변천사는 어쩌면,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할지에 대한 가장 분명한 이정표다. 이제 시민들의 손으로, 그 역사를 새로 쓸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