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무속에 심취하는 이유는 '죄의식' 때문이다

2024년 12월 2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박지원 의원이 던진 한마디는 단순한 정쟁을 넘어섰다. "이 나라가 무속 공화국이 돼선 안 된다." 그는 한덕수 국무총리 부부가 무속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국정 운영에까지 무속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폭로했다. 또한 윤석열 전대통령의 부인이 무속에 쉼취해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신념을 넘어서, 공적 결정에 비합리적 요소가 개입되고 있다는 심각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 무속인가: 죄의식을 해소하려는 본능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무속과 샤머니즘은 단지 전통문화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널리 퍼져 있다. 고위 공직자, 연예인, 경제인에 이르기까지 무속에 의존하는 현상은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확산의 이면에는 '죄의식'이라는 깊은 심리적 뿌리가 있다.
현대인은 외면적으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경쟁과 탐욕, 이기심으로 인해 누군가를 짓밟고 얻은 성공, 비윤리적 선택, 책임 회피 등으로 인한 죄책감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 감정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형벌에 대한 실존적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권력자와 독재자가 무속에 빠지는 이유 — 한국적 사례를 중심으로
권력자와 독재자들이 무속에 심취하는 이유는 단순한 심리 위안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무속을 통해 스스로의 권력을 '신비화'하며, 자신이 예언자적 직관과 초월적 판단력을 지녔다고 믿거나 믿게 만든다. 무속은 그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고, 윤리적 정당성을 우회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또한, 복종과 순응을 기반으로 한 무속의 위계적 구조는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대표적인 사례는 박정희 정권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무속에 관심을 보였고, 장기집권기에는 유명 무당과의 접촉이 공공연히 거론되었다. 심지어 유신체제의 헌법 개정 시기에도 '하늘의 뜻'을 운운하며 무속적 정당성을 동원했다는 설은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심각한 우려를 자아냈다. 그의 딸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무속인 최순실과의 유착으로 국정농단 사태를 초래하며 무속과 권력의 위험한 결합을 다시금 입증했다.
조선 말기의 철종과 고종 시대에도 무속의 영향은 국가 차원에서 작용했다. 특히 명성황후는 각종 무속행위에 몰두했으며, 이는 쇠락해 가는 왕권과 사회 혼란 속에서 정당성과 심리적 위안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외세의 침입과 제국의 몰락이었다.
무속은 복잡한 논리나 공적 검증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독재자들은 무속의 예언과 굿, 상징 언어를 통해 자신의 정권을 포장하고, 국민의 비판을 '하늘의 뜻'으로 무력화시키려 한다. 무속은 그들에게 있어 죄책감을 제거하는 의례인 동시에, 비판을 막고 권력을 영속시키는 수단인 것이다.
전통종교의 방식: 죄의 본질과 마주하는 시간
전통종교는 이 죄의식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천주교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고백하고 보속한다. 불교는 업보와 윤회를 통해 죄의 인과를 인식하게 한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회개와 용서를 가르친다. 이들 종교는 죄를 단순히 제거하려 하지 않고,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기독교에서 회개(μετάνοια, metanoia)는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의지의 선택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전제로 한다. 이 회복은 순간적으로 끝나지 않으며, 인격적 갱신의 여정을 필요로 한다.
무속의 방식: 죄의식을 의례로 덮는 문화
반면 무속은 죄의 본질을 마주하지 않는다. 굿, 부적, 정화수, 제사 등의 의례는 죄책감을 단번에 씻어내는 듯한 감각만을 제공한다. 복잡한 도덕적 성찰이나 내면의 변화는 요구되지 않는다. 마치 행위 하나로 모든 죄가 해결된 듯한 착각을 심어주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점점 더 큰 굿, 더 자극적인 의례에 집착하게 되며, 죄의 본질과는 점점 멀어진다.
정치와 무속의 결합이 초래할 위험
정치 영역에서 무속이 개입할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정책 결정의 왜곡: 무속이 정책 판단 기준이 된다면, 국정은 이성과 합리성에서 벗어나 길흉화복이라는 주관적 세계로 이동하게 된다.
권위주의 강화: 무속은 폐쇄적이며 위계적인 구조를 가지므로, 지도자가 예언자처럼 군림하는 구조를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
공공 윤리의 훼손: 민주주의는 투명성과 공공성을 기반으로 하지만, 무속은 사적이고 은밀하며 책임 소재를 흐리게 만든다.
역사적 반복의 경고: 조선 말기, 왕실과 무속의 결탁은 국정 혼란과 외세 침탈의 빌미가 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진정한 회개 없는 속죄는 공허하다
무속은 속죄의 느낌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죄는 남아 있고, 인간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반복해서 굿을 하고, 부적을 찾는다. 이는 회개가 아닌 중독이며, 갱신이 아닌 악순환이다.
기독교의 회개는 정서적 위안을 넘는다. 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은혜로 덮이는 여정이다. 이는 단순한 감정 해소가 아니라, 인간 존재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는 영적 혁신이다.
무속의 공공 침투 앞에 놓인 질문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누가 이 나라의 영혼을 이끌고 있는가?"
무속인가, 회개인가? 권력인가, 은혜인가? 이 나라가 다시는 무속 공화국으로 치닫지 않도록, 우리는 지금 분명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 죄는 굿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오직 진실한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 짐을 덜 수 있다. 이 진리를 잃는 순간, 우리는 사회와 영혼의 중심을 함께 잃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