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연] 구원자 신화의 그림자, 민주주의의 민낯

왜 우리는 반복해서 구원자를 찾는가
경제가 어려우면 '경제 대통령'을, 안보가 불안하면 '강력한 지도자'를, 불공정에 분노할 때는 '정의의 사도'를 염원한다. 마치 메시아를 기다리는 종교적 열망처럼, 우리는 정치에서도 특정 개인에게 모든 문제의 해답을 기대한다. 박정희에서 윤석열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치사에는 위기와 갈망의 시대마다 '구원자'로 등장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또 다른 실망과 새로운 구원자 탐색의 순환으로 이어졌다. 이 반복적 패턴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며, 민주주의에 어떤 함의를 갖는가?
정치는 본질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해법은 차선이거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과정이다. 위기 상황일수록 이러한 현실은 외면받기 쉽고, 사람들은 단순하고 명쾌한 해답을 원하게 된다. "이 사람만 믿으면 된다"는 기대는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환상으로 이어지고, 결국 포퓰리즘의 토양이 된다. 그러나 특정 개인에게 모든 권한과 책임을 집중하는 방식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훌륭한 제도, 성숙한 정당, 성찰하는 시민이라는 삼박자가 맞아야 제대로 작동한다.
정당은 민주주의의 허리다. 다양한 목소리를 수렴하고, 정책을 숙의하며, 인재를 발굴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중심 기구다. 하지만 오늘날 정당은 점점 선거 승리라는 단기 목표에 매몰되어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정책보다는 이미지, 토론보다는 감정 자극에 집중하며, 유권자의 시선은 '정당'이 아니라 '인물'에 머물게 된다. 인물이 곧 정치를 대변하면서 메시지는 자극적으로, 정책은 포장지로 전락한다. 그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누가 우리를 구할까'를 묻고,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다시 새로운 구원자를 찾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구원자 정치는 편안함을 제공한다. 복잡한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줄 것이라는 환상은 달콤하고, 단숨에 세상이 바뀌리라는 기대는 짜릿하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그와 정반대다. 문제는 복잡하고, 과정은 더디며, 결과는 불완전하다. 바로 이것이 민주주의의 민낯이며, 우리가 직면하고 감내해야 할 현실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정치에 대한 피상적인 관심을 넘어서 깊이 있는 참여로 나아가야 한다.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감정에 휩쓸리기보다는 이성적이고 균형 잡힌 판단을 해야 한다. 이상적인 환상에 머무르기보다 현실의 제약 속에서도 가능한 해법을 찾기 위한 토론을 지속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특정 개인의 힘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민 모두가 함께 감당해야 하는, 불편하고 느리지만 본질적인 여정이다. 여론조사 결과나 유튜브 조회수 몇 번으로 세상이 바뀌리라는 기대는 착각에 불과하다. 민주주의의 진보는 시민 각자가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비로소 가능하다.
우리가 정치에 실망할 때가 어쩌면 진짜 정치가 시작되는 순간일 수 있다. 정치는 완벽한 구원을 약속하는 기술이 아니다. 실망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그 감정 속에서 또 다른 구원자를 기다리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감정의 소비일 뿐이다. 정치는 길게 보고, 천천히 가며, 무엇보다 함께하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누가 우리를 구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어떤 사회를 함께 만들어갈 것인가?"를 물을 때다. 민주주의는 구원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민 각자가 주체로 참여하고 행동할 때 진정한 생명을 얻는다.